페라리의 고향 마라넬로

ROAD TRIP IN EUROPE(3)

ROAD TRIP IN EUROPE(3) 

페라리의 고향 마라넬로


  

자동차 마니아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곳. 이탈리아 모터라인의 중심인 모데나와 마라넬로는 큰 도시는 아니지만 구석구석 볼거리가 풍부하다. 특히 자동차 관련 박물관만 해도 3, 근처 볼로냐까지 합치면 무려 6개 정도이다. 지난 기사에서 다룬 모데나는 마세라티가 오래전부터 터를 잡은 곳이라면 이번에 소개할 마라넬로는 바로 옆 동네이자 페라리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티포시를 위한 공간은 아래층에 마련되어 있다


이탈리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나 피사, 베네치아, 나폴리 같은 남부 관광지를 떠올린다. 일 년 내내 온화한 기후와 오래된 유적, 아름다운 풍광은 이탈리아 관광산업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관광산업 외에 공업이 매우 발달한 곳이다. 자동차와 바이크를 비롯해 건설장비, 커피 추출기, 의료기기에 이르기까지 기술력이 필요한 제품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9년 피오라노 서킷 기록을 갈아치운 599XX 


보통 사람들은 자동차나 기계하면 독일을 떠올린다.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독일이 이 분야에 선두임을 입증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자동차와 기계 산업은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가 독일보다 훨씬 앞서 시작했다. 자동차만 예를 들어 보자면 메르세데스 벤츠를 제외한 독일 차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1990년대 오면서부터다.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는 저마다 개성 있는 자동차를 1900년대 초부터 선보였고, 사람들의 생활수준 역시 높은 편에 속했다.


호몰로게이션을 목표로 개발했지만 정작 모터스포츠에서는 뛰지 못했던 288GTO. 그러나 자동차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모델이다


아무튼 이탈리아의 자동차 산업은 생각보다 오래되었고 연관된 산업 역시 역사가 매우 길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탈리아 자동차 브랜드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페라리는 고작(?) 70년 남짓 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람보르기니나 파가니도 있지만 피아트를 필두로 란치아, 알파로메오, 마세라티 등 100년이 넘은 회사에 비하면 역사가 짧다는 의미다.


2002년 공개된 엔초 페라리의 심장. V12 6.0L660마력을 낸다


인접한 지역인 모데나와 마라넬로는 거의 구분이 없는 옆 동네다. 지역색이 강한 이탈리아에서는 옆 동네라도 어디 출신이냐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편의 상 모데나는 마세라티, 마라넬로는 페라리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구분되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마세라티의 본사와 공장(지금은 MC20을 만드는)이 모데나에 있고 페라리 공장과 본사가 마라넬로에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도 마찬가지다. 지난번에 소개했던 파니니 컬렉션은 모데나 외곽에 있고 이번에 소개할 페라리 박물관과 엔초 페라리 박물관은 각각 마라넬로와 모데나 구시가지에 있다.


전시 일정 확인과 예약은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으며(https://www.ferrari.com/en-EN/museums)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임시 휴관 중이다(20211월 중순까지). 



페라리 플래그십 역사가 집대성된 페라리 박물관


1947년 페라리 최초의 로드카로 등장한 125S. 총 생산 대수는 단 2


마라넬로 페라리 본사 건너편에 있는 페라리 박물관은 자동차 마니아들에게 익숙한 곳이다. 19902월 개장한 이곳은 페라리의 역사 그 자체이다. 매 시대 페라리를 상징했던 모델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페라리하면 수퍼카 브랜드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스포츠카 브랜드가 정확하다.

페라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수퍼카 라인업은 250 GTO, 250 LM, F40, F50, 엔초 페라리, 라 페라리, 라 페라리 아페르타 뿐이다. 또한 로드카의 전통적인 플래그십은 FR 레이아웃을 가진 V12 GT 라인으로 365GTB/4(데이토나 쿠페)를 시작해 550 마라넬로, 575M 마라넬로, 599GTB 피오라노, F12 베를리네타, 812 수퍼패스트로 이어진다. 지금은 사라진 박서 베를리네타 시리즈에는 365BB, 512BB, 테스타로사, 512TR, F512M 등이 포함된다. 현재 페라리 라인업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미드십 V8 라인업은 308을 시작으로 208, 몬디알, 328, 348, F355, 360, 458을 거쳐 488F8 트리뷰토로 이어진다.


페라리 F1 2000. 로스 브라운, 미하엘 슈마하의 조합으로 데뷔해(2000) 17번의 그랑프리 중 10승을 기록했다 


지금이야 페라리가 연간 1만대 이상을 생산하며 성공한 스포츠카 브랜드로 자리를 잡았지만 초창기에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보수적인 시장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워낙에 엔초 페라리가 로드카 시장에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초기 모델은 생산량도 적어 구색 맞추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1950년대 모터스포츠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기 위해 공개한 아메리카 시리즈가 미국에서 크게 성공하며 유럽 로드카 시장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500 수퍼패스트와 365 캘리포니아는 현재 생산되는 같은 이름 모델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아기자기한 소품이 가득한 기념품 가게에서 구입한 티포시 베어


복잡하고 다양한 모델을 선보이며 매 시대의 아이콘으로 성장했지만 마라넬로의 페라리 박물관에 전시된 모델은 매우 제한적이다. 확실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곳에는 트랙에서 이름을 날렸던 모델이나 페라리 플래그십(V12 GT와 수퍼카) 모델만 전시되어 있다. 현재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V8 미드십은 거의 볼 수 없다.

 

관람객 압도하는 F1 우승 머신들


 

1951년에 F2에 등장한 페라리 500 F2. 직렬 4기통 2.0L 165마력이다


이곳에서 가장 엄숙한(?) 분위기를 가진 곳은 지하에 있는 F1 던전이다. 역대 F1 우승 머신과 페라리 F1 기록을 전시한 곳으로 규모와 전시 내용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역대 우승 머신 주변에는 F1 엔진과 트로피,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거쳐간 드라이버들의 기록물이 빼곡하다. 위쪽 공간이 스포츠카로서의 페라리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라면 F1과 관련된 전시장은 그야말로 골수 티포시를 위한 곳이다.


 

20191월에는 F1의 전설이라 불리는 미하엘 슈머허의 50번째 생일에 맞춰 그와 11년 동안 함께 했던 페라리 F1 머신 특별 전시를 개최했다. 1996F310부터 248F1까지 슈마허와 함께 한 8대의 페라리 F1 머신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박물관 인근은 온통 페라리와 연관되어 있다. 페라리 공장에서 페라리 뮤지엄까지 거리는 400m 남짓으로 걸어서 이동할 수 있으며 운이 좋으면 페라리 공장 투어와 연계해서 이용할 수 있다. 또한 근처에는 페라리 용품을 파는 대규모 상점이 두 곳이 있으며 30분 단위로 페라리를 빌릴 수 있는 사설 업체도 있다. , 주의해야 할 점은 호객 행위가 심한 곳은 이용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임대료 외에 보험에 관련된 사항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페라리 오피셜 용품을 판매하는 곳은 박물관 바로 옆과 박물관과 본사 중간쯤에 있는 매장이 유명하다. 이들 중 박물관 바로 옆에 있는 곳이 저렴하다. 물론 박물관 내에도 기념품 상점이 있지만 세 곳에서 취급하는 물건은 차이가 있다



열정 가득했던 남자의 삶을 기리는 엔초 페라리 박물관

마세라티 버드케이지 시리즈 중 최초의 미드십인 티포 63


마라넬로의 페라리 박물관에서 엔초 페라리 박물관이 있는 모데나 구시가지까지 거리는 대략 25km 정도. 강서구에서 강남 중심가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교통 체증이 거의 없고 급한 성격의 이탈리아 운전자들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동 시간은 30분 이내로 충분하다.

생각 외로 구시가지에는 주차장을 찾기 어렵다. 유럽의 여느 오래된 도시도 비슷한데 주차 공간을 찾는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주차만 잘 해결하면 모데나 구시가지는 볼거리가 상당히 많다. 오래된 카페와 음식점, 골목골목에 자리 잡은 다양한 종류의 공방 등 다른 유럽 지역의 구시가지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훨씬 생기가 넘친다.
 

엔초 페라리의 집무실을 그대로 재현했다 


모데나는 페라리, 마세라티 외에도 올리브와 돼지고기로 유명하다. 남부 이탈리아만큼은 아니지만 온화한 기후가 사계절 어느 때나 관광하기 좋고 소도시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가득하다. 모데나가 배출한 유명인으로는 엔초 페라리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있다. 파바로티가 원래는 페라리를 구입하고 싶었는데, 덩치 때문에 운전석에 들어가기가 힘들어 마세라티를 타게 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53년 밀레밀리아에서 우승한 340MM 비냘레 스파이더. 340 메히코보다 휠베이스가 짧다 


붉은색으로 가득했던 페라리 박물관과 달리 엔초 페라리 박물관은 전체적으로 산뜻한 미술관 느낌이 가득하다. 20123월에 개장했으며 페라리나 피아트의 지원 없이 모데나시에서 투자하고 운영하는 곳이다. 박물관이 위치한 곳은 엔초 페라리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저택 자리. 건축가 얀 카플리츠키와 안드레아 모르간테가 설계를 맡았다.


섀시와 엔진만 제작하던 페라리의 로드카는 코치빌더에 따라 같은 모델이라도 디자인이 다르다


이곳은 모터스포츠와 자동차 산업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남자의 흔적이 가득하다. 고즈넉하고 차분한 분위기는 왠지 페라리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구석구석 엔초 페라리의 열정이 가득하다. 사실 페라리는 자신들의 역사를 논할 때 피아트나 알파로메오, 마세라티를 거론할 때가 많다. 페라리의 시작도 알파로메오와 피아트에 줄기를 두고 있는 만큼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실제 알파로메오와 마세라티는 이런 부분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역사와 기록을 중요시하는 이탈리아 정서상 페라리가 다른 자동차 메이커의 활동상을 함께 소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개관 1주년 기념행사 중이었다. 페라리 박물관과 연계로 이용할 수 있다


전체 전시 공간은 크게 두 군데다. 자동차 전시가 메인인 전시장과 엔초 페라리의 아버지가 소유한 건물에 꾸며진 기록관이다. 원래 이곳은 엔초 페라리 아버지 소유의 저택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기록관 건물은 예전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내부는 매우 우아하고 고급스럽게 리모델링했다.


페라리에서 실패한 브랜드 디노는 생각보다 역사가 길다. 1957년에 등장한 페라리 디노 텔라이오 0011


  

엔초의 자동차와 다양한 유품 볼 수 있어

날렵한 페라리 경주차의 디자인은 스피드 보트의 디자인과도 연관이 있다 


전시 차종은 주제에 따라 변경되는데 대부분은 엔초 페라리가 직접 몰고 레이스에 출전했던 차, 혹은 개발이나 테스트에 사용했던 차종이다. 일부는 페라리 소유지만 대부분이 개인 소장품을 임대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박물관에서 전시만을 위해 보관되는 차가 아니라 언제라도 주행이 가능할 정도의 러닝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페라리는 현재 마세라티와 공생 관계에 있다 


자동차 전시 공간을 빠져나와 기록관에 들어서면 엔초 페라리의 레이스 인생을 투영하는 영상과 사진, 유품 등을 볼 수 있다. 특유의 선글라스와 생전에 사용하던 만년필, 페라리의 모든 꿈이 시작된 집무실까지 모든 소품은 엔초 페라리의 가족으로부터 기증받은 것들로 현재는 모데나시 소유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생전에 그가 열정을 불태우던 시절을 기록한 영상물이다. 스피드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뜨거웠던, 기록에 대한 그의 열정은 페라리라는 스포츠카 브랜드가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 (5편에서 계속)


1958년식 250 GT TDF. 투어 드 프랑스 우승 기념모델이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북부 이탈리아는 매우 매력적인 곳이다. 토리노와 밀라노에는 피아트, 알파로메오, 란치아의 이야기가 있고 이탈리아 모터라인의 아래쪽을 담당하는 모데나와 볼로냐는 열정 가득한 스포츠카들의 볼거리가 풍성하다. 바쁜 일정이 아니면 모데나와 마라넬로, 볼로냐는 천천히 3일 정도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 볼로냐의 람보르기니와 파가니, 엔초 페라리 서킷(구 이몰라 서킷)까지도 둘러볼 수 있다. 꼭 자동차가 아니더라도 북부 이탈리아는 여전히 소박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많다.


쌩뚱맞긴 하지만 마세라티도 한 때는 V12 엔진을 제작했었다


프랑스 아르모이를 출발해 몽블랑 터널을 지나 모데나까지 1,200km를 이동하는 동안 지루할 틈이 없었다. 국경을 넘을 때마다 창밖 풍광과 운전자의 성향이 달라진다. 유럽 여행을 계획할 때 이탈리아를 일정에 넣으면 보다 풍성하고 다양한 추억을 만들 수 있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을 떠나기 어렵다는 현실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엔초 페라리 박물관은 전체적으로 밝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황욱익 기자 사진 황욱익, 박인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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